김치를 사면서

김치를 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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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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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가 “한인 식품점에 김치 도착했다는데 가서 김치 사 와요” 했다.


나는 우리 집 ‘김치 당번’이다. 김치 당번이라니까 김치를 밥상 위에 올려놓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다. 김치 사 오는 책임을 맡고 있다는 뜻이다.


원래 당번이라면 돌아가면서 맡는 것이 원칙이다. 식사 당번, 설거지 당번, 화장실 청소 당번 뭐 이런 것들도 돌아가면서 하는 거다. 그런데 마누라가 정해준 당번은 변하지 않는 책임과 의무다. 마누라의 ‘당번 불변의 법칙’에 의해 나는 항상 김치 당번이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생전 김치를 사서 날라야 한다.


마누라는 김치 살 돈을 주지 않는다. 네 돈으로 네가 사오라는 거다. 억울하다. 가족이 먹는 김치라면 반반 부담 한다든지 아니면 교대로 사 오는 것이 공평과 평등의 원칙 아닌가? 뒤돌아서 주둥이를 내밀면 마누라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날카로운 일침을 날린다. “우리 집에서 김치는 당신이 혼자 거의 다 먹잖아!”


제길! 맞긴 맞는 말이다. 나는 끼니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김치를 먹는다. 식성이 개방적인 마누라는 김치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아들 내외도 김치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양식에 습관이 된 손녀들은 김치를 거의 손대지 않는다. 


그저 나만 일편단심 민들레, 아니 김치다. 어쩌다 한번 둘째 손녀가 김치를 손댈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예뻐 죽겠다. 암, 한국사람은 김치를 먹어야지! 


그때 이민을 결정하고 난 후에 아들 친구가 송별 인사차 찾아왔었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꼰대의 주제넘는 아는 체, 설교, 훈육, 횡설수설,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나는 끝으로 결의에 찬 한마디를 던졌다. “뉴질랜드에 가면 식단도 서양식으로 모두 바꿔 삼시 세끼를 빵과 고기와 우유로 하겠다.”


이럴 때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개뿔!


옳은 말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빵과 고기와 우유로는 이틀을 못 견뎠다. 이건 도대체 먹는 것이 먹는 게 아니었다. 먹고 나도 뭔가 개운치 않고 속은 소화가 안 된 듯 더부룩했다. 무엇보다 김치가 먹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식성을 하루아침에 바꾸기에는 내 의지가 너무 약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밥에 김치에 된장국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들 친구 앞에서 호기를 부렸던 결의는 말짱 헛것이 돼버린 거다.


마누라는 식성 촌스럽고 먹는 것도 세련되지 못한 남편 입맛 맞추겠다고 중국식품점을 뒤져 양배추를 비롯해 배추 비슷한 얄궂은 채소를 사고, 이런저런 양념을 어렵게 구해 김치 비슷하게 김치라고 담갔다. 김치라고 힘들게 담그는 마누라의 마음 씀에 속으로 많이 미안했다. 그런 탓에 김치 같지도 않은 김치를 김치라고 밥상 위에 올려놓아도 툴툴대지 못하고 조용히 먹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한인 식품점에서 한국 채소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민 1세대 한국인들이 농장을 일궈 피땀으로 가꾼 배추, 무, 파, 상추, 고추 등등의 채소가 출하를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김치도 제대로 된 김치를 담글 수 있었다. 


그런데 김치 담그는 일은 의외로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이 든 마누라는 김치를 담그면서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며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김치산업으로 대량생산되는 김치가 수입되어 한인 식품점에 진열됐다. 


마누라는 이제 손수 김치를 담그지 않는다. 사다 먹는 김치가 맛도 괜찮고 편하다고 한다. 마누라가 담그는 배추 생김치 겉절이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평화를 위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마누라가 직접 담그는 김치가 훨씬 맛있다. 마누라가 담그는 김치 맛은 신기하게도 내 어머니가 담갔던 김치 맛과 흡사하다. 


고국에서는 상시 먹었던 김치가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시며 교민음식점에서 김치 한 보시기 더 주는 걸 감사하게 여겼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김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살 수 있는 한인 식품점 냉장고에 있다. 마누라는 김치 담근다고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때맞춰 김치 사 오라고 나만 채근하면 된다.


이런 것도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세상일이 덧없이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좌우간 김치 당번이야 뭐 어쨌건 김치를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건 좋다. 한데 김치를 살 때마다 농장을 일구며 피땀 흘리는 교민들에게 왠지 모르게 괜히 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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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_세 손녀 할아버지(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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