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믐달을 보았다

나는 그믐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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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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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 그래 지금은 모두들 /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이 시는 삶의 힘겨움과 서민들의 애환이 모여있는 대합실이라는 공간이다. ‘그믐처럼 졸고’ ‘감기에 쿨럭이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다. 


시인은 ‘싸륵싸륵 쌓이는 눈꽃’으로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고, 힘겨운 삶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과 희망으로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고 표현했다.


부족한 내가 주제넘게 시인의 시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를 읽고 잊혀지지 않는 작은 아픔이 떠올라 주절거린 것뿐이다.     


50년 전 일이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서울 ‘구로공단’에 위치한 ‘성화섬유’라는 회사에 취직이 됐다. 당시 성화섬유는 국가의 수출정책에 얹혀서 지원을 받는 중소기업이었다. 


성화섬유는 실내 슬리퍼를 제조해 수출했다. 생산된 호화스러운 실내 슬리퍼는 전량 미국 유럽 남미 쪽으로 실려 나갔다.


나는 프레스부로 발령받았다. 프레스부에 근무하는 정식직원은 40줄에 든 반장과 나 둘뿐이었고 나머지 30여 명은 일당제 ‘공돌이’들이었다. 공돌이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온 못 배우고 가난한 젊은이들이었다.


프레스부에서는 고무 재질인 신발 바닥과 털이 덮인 천 재질인 신발 등을 프레스기로 찍어냈다. 12시간 2교대인 공돌이들은 그날그날 주어진 책임량을 달성하기 위해 손발이 바쁘게 프레스기를 움직였다.


나는 공돌이들을 지원하고 독려(?)하고 찍어낸 슬리퍼 바닥과 등을 봉제부로 넘겨주는 일을 했다. 봉제부에서는 프레스부에서 넘겨진 슬리퍼 바닥과 등을 40여 명 남짓한 ‘공순이’들이 열심히 재봉질을 해 완제품을 만들어냈다. 


공돌이들과 공순이들은 열악한 회사 식당에서 밥 먹고 기숙사에서 잠잤다. 그들의 급여는 기숙사비 제하고 남은 돈으로 영등포 시내에 나가 통닭 한 마리와 생맥주 500cc 두 조끼면 바닥이 났다.


그들에게 그날 할당되는 책임량은 12시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해도 달성하기가 빠듯했다. 그런데도 반장의 “책임량 다하면 쉬어도 좋다”는 말에 손발이 바빠졌다. 


제품 선적 날짜가 가까워지면 그들의 손발은 더 바쁘고 불안했다. 공돌이들은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부셔지는 일이 종종 발생했고 공순이들은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이 찍혀 피를 흘리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녀석은 나를 유난히 따랐다. 강원도 산골이 고향이라고 했다. 녀석은 시를 좋아한다면서 자신은 시인이 되겠다고 했다. 어느 날 녀석의 검지와 중지가 프레스기에 눌려 끝이 부셔졌다. 


나는 녀석의 손을 붙들고 공단병원으로 뛰었다. 녀석은 나와 함께 뛰면서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손가락 자르지 말아주세요. 난 시를 써야 해요” 


나는 의사에게 손가락을 자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무표정한 의사는 다친 손가락 마디를 망설이지 않고 끊어냈다. 후에 알았지만 그것은 회사와 병원 간의 약속이었다. 치료 기간은 짧고 간단하게!


그들은 그렇게 견디어 설날이 되면 고향을 찾아 완행열차를 타려고 기차역으로 갔다. 대합실에 앉아 시린 손을 비비며 막차를 기다렸다. 


그믐처럼 졸고 쿨럭이는 감기처럼 고단한 삶들이 웅크리고 앉아 그믐달처럼 누구도 돌아보지 않은 쓸쓸함과 아픔을 침묵으로 씻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었다. 


그믐달은 새벽녘에 잠시 보였다가 일출과 함께 사라진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드는 사람들은 그믐달의 존재를 모른다. 그믐달은 존재 속의 무 존재다. 그러나 그믐달이 지면 초승달이 뜨고 초승달이 지면 보름달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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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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