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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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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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직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순다섯살이 되자 노후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연금 수혜 자격을 심사하는 심사관이 컴퓨터를 보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했다. 라디오방송국은 팔았냐? 아니 망했다. 다른 수입이 있냐? 영어 학교에 다니면서 생활보조금 받았는데 끝났다. 요트를 가지고 있냐? 웃으면서 대답했다. 돈이 있으면 사고 싶다.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면서도 혹시 연금 수혜 자격 미달이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땀 흘리지 않은 대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삶이 가져온 서글픔이었다.


심사관이 연금 액수와 지급 날짜를 알려줬다. 내 몫은 나에게 아내 몫은 아내에게 지급된다고 했다. 이젠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아내 걱정 없이 어디든 훨훨 날아다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외롭게 버텨온 지나간 세월이 꿈결 같았다.


입사 시험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설쳤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고학생을 사랑으로 감싸며 지켜준 아내가 고마웠다. 


단칸 셋방살이에도 어두운 표정 한번 짓지 않은 아내에게 미안했다. 대지주 손녀로 세무공무원 여식으로 가난과 궁핍의 실체를 모르는 아내이기에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희망차고 설렌 날들이 이어졌다. 임원 자리가 눈앞에 보였다. 머지않아 바다 건너 아픈 길을 떠나야 한다는 걸 몰랐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운명이며 여정인가?


호주로 가려고 했지만 ‘이민점수’가 모자란다고 했다. 돌아서는 나에게 이민회사 직원이 말했다. 뉴질랜드는 점수가 돼요. 거기서 3년 살면 호주 갈 수 있어요. 뉴질랜드로 왔다. 살다 보니 호주로 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산천은 낯설었지만 살아가야 했다. 이민자의 삶은 고달팠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손댄 라디오방송국을 버티고 버티다 결국 털어먹고 말았다. 영국인이 운영하는 청소회사에 어렵게 청소부로 취직했다.


오피스타운과 생산공장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다. 지린내 나는 변기를 닦으면 쓸쓸함이 올라왔다. 청소를 마치고 고달픈 육신을 가누며 술잔 앞에 앉으면 생경한 모습의 내가 술잔 속에 있었다. 이게 난가? 내가 처음으로 나를 안고 소리없이 울었다.


어느 뜬금없는 날, 이민 와서 알게 된 어떤 녀석이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3년 동안만 맡아 달라고 했다. 자신은 한국 지방 기업 청와대 출입 담당으로 스카우트돼 떠난다고 우쭐댔다. 나는 3년 후면 연금 수혜 자격이 되므로 그렇게 해도 괜찮지 싶었다. 녀석을 믿고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청소회사를 사직했다.


녀석이 한국에 도착한 직후 스카우트는 사기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부인이 당연하다는 듯 남편이 돌아오니 물러나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내 인생 최대의 굴욕이었다.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삭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믿고 일자리를 바꾼 나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 늙은 실업자가 돼 버렸다.


세상살이에 영악하지 못한 나는 아내와 며칠을 다퉜다.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나이가 아킬레스건이었다. 연금 나올 때를 손꼽으며 분노와 좌절 속에서 허덕거려야 했다. 내 삶의 스펙트럼은 고달픔, 방황, 외로움이었다.


눈을 감아보면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인이 보인다. 한번 사는 세상 왜 그리도 모질었는지.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휘청거렸다.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인생의 편린들이다. 그 길고 아득한 여정이 한겨울 낮의 꿈이었던 거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노을이 물든 검푸른 바다 위엔 요트가 떠다닌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다닌다. 요트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뒷짐 진 노인의 뒷모습이 평온하다. 눈을 뜨면 꿈속이었다. 눈물이 가만히 흘렀다. 노인은 깨달았다. 이제 시작보다는 끝에 가깝다는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가 있다. 우리는 이 땅에 괴롭고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래, 이젠 악착같이 행복해 져야한다. 삶이 곧 기적이니까!


“어느 맑은 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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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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