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공기 다 비우기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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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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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 꿈은 위대한 과학자도 대통령도 장군도 아니었다. 그 시절 나의 간절한 꿈은 밥을 배 터질 때까지 먹는 것이었다.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지은 밥은 식구들 밥 한 그릇씩 채우기에도 간당간당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다닥 밥 한 그릇 비우고 나서 입맛을 다셔봐야 더 먹을 밥이 없었다. 더 달라고 투정 부리면 어머니 밥이 줄어든다는 걸 나는 어렸지만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형님이 주선해서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그땐 신문구독료를 수금하면 책임액이 완납될 때까지 신문보급소에 전액 입금시켜야 했다. 보급소에서는 수시로 영수증 검사를 통해서 책임액이 완납되기 전에 수금액을 사용하는지 감시했다. 나는 형님에게 먼저 검사를 받았다.  


해가 긴 어느 여름날, 신문 배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점상 아주머니가 좌판을 벌려놓고 양갱을 팔고 있었다. 나는 지치고 배고팠고 양갱도 먹고 싶었다. 주머니 속에는 그날 수금한 구독료가 있었다. 앞뒤 생각없이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개의 양갱을 사 먹었다.


평소 수금한 구독료는 절대 써서는 안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강직한 형님의 무서운 얼굴도, 그렇게 사 먹으면 안된다는 어린 나의 이성도 배고픔 앞에서는 헛것이었다. 수금한 구독료가 비어 있음을 저녁에 형님에게 들켰다. 머리통을 얻어맞으며 혼이 나고 양갱을 사 먹었다고 징징대면서 실토했다. 


나의 배고픈 아픔은 질기게 남아 직장을 얻었을 때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이제 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혼 시절에는 아내가 밥을 딱 맞게 지어 더 먹을 밥이 없으면 짜증을 부리곤 했다. 


세상이 좋아진 건지 벌써부터 고국에서는 쌀이 남아돈다고 한다. 쌀이 남아도니 농민들이 농사를 잘 지어서 쌀 수확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쌀값은 떨어지고 더불어 농민들의 수입도 줄어든다. 농사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농민들은 시쳇말로 죽을 맛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총생산이 세계 10위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백성들은 허기지고 배고프다.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으로 남아도는 쌀 사서 농민들 고통도 덜어주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면 안되는가?


국민의 고통을 덜어줄 책무를 가진 정부 여당에서 ‘민생119’ 라는 정책팀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국에서 119는 구조 및 안전신고센터 전화번호다. 그러니까 민생119 정책팀은 국민들의 고통을 안전하게 해결해주는 팀이라는 뜻이다. 팀 이름이 아주 그럴싸하다.


정부 여당의 최고위 수준이라는 민생119정책팀에서 농민들의 고통인 쌀값 대책을 야심 차게 발표했다. 민생119위원장이라는 여성이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책이라고 우쭐대며 발표한 거다.


잘 모르긴 하지만 이런 정책을 국민들 앞에 내놓기까지는 수많은 아젠다를 탁상 위에 올려놓고 밤새워 검증과 토론을 거쳤을 터! 사람들이여 놀라지 마시라. 그건 ‘밥 한 공기 다 비우기’다.  


대한민국 여성들이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한 몸매를 만들려고 밥 한 공기도 다 먹지 않기 때문에 쌀이 남아돌아 쌀값이 떨어져 농민들의 수심이 깊어진다는 거다. 해서, 밥 한 공기를 다 먹으면 쌀이 남아돌지 않을 거고 당연히 쌀값도 떨어지지 않아 농민들에게는 만만세라는 논리다.


실로 황당무계한 발상이다. 헛웃음만 나온다. 너무 어이없고 한심해서 정말 하늘이 경끼나고 땅이 요동칠까 봐 겁난다. 이것이 국가를 이끌어 간다는 높으신 분들의 우수한 두뇌에서 나온 민생을 위한 정책이다. 


어쩌면 이렇게 신중하지 못하고, 진지하지 못하고, 경박스럽기만한지 어처구니없다. 이건 국가의 정책이 아니라 무료 배식소 앞에 길게 늘어선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배부른 자들의 빈정거림이다.


지금은 밥만 먹는 시대도 아니다. 밥 외에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난다. 적게 먹고 날씬하게 살겠다는 성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시대에 밥 한 공기 다 비우기가 쌀값 안정을 위한 정책이라고 흰소리를 늘어놓고 있으니, 당장 다들 물러나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도대체 이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말 좀 해줄 사람, 거기 누구 없소?


사족이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아들에게 나의 배고팠던 시절 얘기를 한담처럼 늘어놓으면서 어릴 적에 있었던 양갱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젠 늙어가는 아들이 늙어버린 애비에게 가끔 한인 식품점에서 양갱을 사다 준다. 구독료 수금한 돈으로 사 먹고 형님에게 혼났던 그 양갱 맛이 놀랍게도 그대로다. 


아들이 사다 준 양갱을 먹노라면 찡해지면서 배고픈 그때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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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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