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세네카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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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의 책따라 생각따라(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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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산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평판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세상에 비춰지는 내 모습은 야무지고, 정리 정돈을 잘하고, 부지런한 일벌이었다. 남들 보기에는 에너지가 넘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실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지칠 대로 지쳐서 책 한 권조차 읽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을 홀로 보내곤 했다.’ 

이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인 것이다. 바쁘게 살아야만 잘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덕에 많은 사람의 삶이 풍요로워졌다. 디지털 도구 덕분에 삶이 더 편리해졌지만, 유지해야 할 수많은 계정과 걱정해야 할 알람(alarm)들이 생겨버렸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짐이다.

인터넷은 우리가 정보를 공유하고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았다. 1950년대 40시간에 걸쳐 처리하던 일을 지금은 11시간이면 완수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24시간 뉴스채널과 인터넷 뉴스 사이트들이 인기를 누리며 확산되었다.

삶의 많은 측면이 게임화되었다. 요리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은 음식 만들기를 퍼포먼스로 바꿔버렸다. 트위터는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을 점수로 매겨진다. 인스타그램 같은 사이트는 공예품 만들기조차 경쟁적으로 바꿔버렸다.

데번 프라이스는 사회 심리학자, 작가, 시민 활동가,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평생 교육대학의 교수이다. 그의 연구는 <슬레이트>, <더 럼퍼스> 잡지와 뉴스 플랫폼 <NPR>, <허프 포스트>에 소개되고 있다, 저서로는 <자폐증 폭로>가 있다.

‘게으른(Lazy)’이라는 단어는 1540년경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일이나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사용되었다. 이 말은 ‘연약한(feeble)’ 혹은 ‘약한(weak)’이라는 중세 독일의 ‘lasich’ 또는 ‘악한(evil)’을 뜻하는 고대 영어 ’les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쉬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생산적이지 않은 사람은 생산적인 사람인 사람보다 내재 가치가 적다는 신념 체계에서 나온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모두가 나태해지고 무능해질 수 있으며, 약하다는 신호는 무엇이든 불길하다고 말한다. 사실 게으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게으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걸 멈출 때 재충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교감하고, 좋아하는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느긋한 속도로 세상을 헤쳐 나아갈 시간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강력한 자기 보존 능력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게으름을 시간 낭비라는 잘못된 틀에 가두어 버렸다. ‘시간 낭비’는 인간의 기본 욕구다.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균형 잡힌 삶을 꾸릴 수 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다. 삶들은 휴식과 ‘게으른’ 시간을 갖지 못할 때보다 인습적이고 창의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사고해 생각이 막힐 가능성이 더 커진다. 

심리학자들은 생산적 휴식 시간을 ‘부화기(incubation period)’라 부른다. ‘사이버로핑(cyberloafing)’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잘 아는 형태의 늑장 부리기이다.

페이스북이나 온라인 쇼핑을 브라우저로 탐색함으로써 스트레스와 탈진에서 벗어나려는 현상이다. 사이버로핑으로 탈진된 사람(burnout)들이 직장이 고마운 줄 모르고 일만 시킨다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같은 현상은 같이 일하는 동료로 확산되어 ‘소진 전염 효과(burnout contagion effect)’가 일어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게으르다’고 분류되는 전형적인 세 부류가 있다. 우울한 사람, 늑장 부리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이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찾는 일은 모두 ‘음미(savoring)’로 귀결된다. 

우리 삶의 목적은 ‘들판을 달리면서 최대한 많은 장미 향을 빨리 맡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장미 향을 맡는 것’이다. 그게 음미(吟味)이다. 우리는 자주 ‘게으름’을 우리가 진정으로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호사로 여긴다. 게으름은 죄악이 아니고 바로 음미인 것이다.

 김영안

한국서예협회장, 전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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