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 놀이

완장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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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제일 두려워 한 시간은 시험도 아니고 다름 아닌 학교 교문을 통과할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교문 앞에 서 있던 선도부원들이 두려웠다. 


그들은 고학년이라 나보다 덩치가 훨씬 커서 무서웠기도 했지만, 그들의 왼쪽 팔에는 노란색 바탕에 ‘선도’라고 적힌 완장이 있었고 “야! 거기, 너, 이리 와봐”라고 부르던 목소리는 마치 저승사자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나는 교문을 지나기 몇십 미터 전부터 안 그래도 짧게 자른 머리를 손에 침을 발라 누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거북이처럼 목을 한껏 집어넣고 눈은 내리깔고 바닥만 보면서 마음 졸이며 교문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나도 고학년이 되면 꼭 선도부 할 테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 ‘선도’ 완장을 차 보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완장은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팔에 두르는 표장이다. 하지만 완장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압제와 공포통치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은 최하층 사람에게 완장을 채워 지배계급을 처단하게 했다. 


8천만 명을 죽였다는 중국 문화대혁명에서는 홍위병들에게 붉은 완장을 채워 그들을 미쳐 날뛰게 했다. 또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왼쪽 팔에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새겨진 붉은 색 완장을 찼고, 친위대와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 대원들에게도 완장을 채웠다. 


‘완장’하면 어렸을 때 조형기 씨 주연의 ‘완장’이라는 드라마를 본 것이 생각난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 드라마의 원작이 윤흥길 작가의 1983년 작 소설 ‘완장’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서 읽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주인공 종술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한량 생활을 하고 있다. 동네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최 사장은 일도 없이 저수지에서 야밤에 몰래 고기를 잡고 저수지 개발을 반대하는 종술이 눈엣가시다. 최 사장은 종술을 저수지 감시원으로 임명한다. 종술은 이때부터 ‘감독’이라고 새겨진 노란색 완장을 차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종술의 그 권력은 야밤에 도둑 고기잡이를 하던 초등학교 동창 부자를 폭행하여 아들의 귀청을 터지게 하기도 하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다짜고짜 매타작을 안기는 등 마을의 독재자로 군림한다. 


완장을 두른 종술은 마침내 자신의 고용주인 최 사장의 낚시도 막는 등 행패를 부린다. 종술은 경찰에 쫓겨 완장의 허황됨을 일깨워주는 술집 작부 부월이와 마을을 떠난다. 


종술과 같이 떠나는 부월은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시나 줏어먹는 핫질(下質)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물이 빠지는 저수지 수면 위에 완장이 떠다니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완장은 누군가에게는 권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통제의 상징이다. 종술처럼 완장을 찬 자가 그동안 몰랐던 권력의 맛에 눈을 뜨고 그 권력을 극대화하여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그를 부추긴다. “힘은 있을 때 써야 한다!” “네가 힘이 없어 지면 제일 먼저 달려드는 게 너에게 당한 놈들이야.” 어찌 보면 완장을 찬 사람보다 뒤에 숨어서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그 완장을 채워준 사람이 더 나쁜 자(者)이다.


아무리 욕을 많이 먹더라도 능력 없으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완장을 차고 ‘완장 놀이’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만은 꼭 알았으면 좋겠다. 


완장을 달려면 뾰족한 핀이 필요하다. 그런데 잘못 차게 되면 그 핀으로 자기 살을 찔러 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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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원_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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