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6.25(2회) 시커멓게 열꽃을 내 뿜으며 죽어간 내 동생이여
[6월 호국 보훈의 달 특별 소설] 그 남자의 6.25(2회)
고단한 하루.' 1952년 어느 날, 짐꾼이 바닥에 앉아 졸고 있다.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작가 오소영(수필가)의 특별 소설 ‘그 남자의 6.25’를 세 번에 나눠 싣는다.
오소영 작가는 1937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전쟁 세대이기도 하다.
사진은 키위 참전 용사 월리 와이엇트(91세)가 제공했다.<편집자>
어머니와 동서는 오랜 실랑이를 벌였다. 마침내 숙모는 피난을 결정했다. 세 살배기 사촌 동생과 짐보따리가 만만치 않았다. 일찍 서두른 탓에 한강철교가 끊기기 전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왔다. 어진네 식구 여덟 명과 마을 사람 열댓 명이 일행이었다.
산속 동네는 너무 추웠다. 남의 집 곁방살이도 힘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전세가 점점 더 불리해졌다고 야단이었다. 결국은 이곳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며 다른 곳으로 또 피난을 가야 한다고 했다. 이십여 식구의 대부대가 한데 어울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피난길에 나섰다.
저마다 이고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정처 없이 내디뎠다. 열네 살 어진에게 주어진 몫은 쌀 한 말이었다. 쌀자루가 사정없이 어진을 밀어냈다. 쌀 한 말에 어이없이 져버린 어진이를 보며 어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바보 같으니. 여태 먹은 건 어쩌구 그렇게 기운이 없어.”
어진의 머리에 쌀자루 대신 커다란 양은 대야가 얹혔다. 솥단지며 자잘한 그릇들이 담겨 있었다.
“이거라도 이고 가야 밥을 해 먹지.”
그렇게 일행은 피난 행렬 속으로 묻어 들어갔다. 평택 쪽으로 가는 거라고 했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포탄이 날아왔다. 비행기 폭격도 심했다. 누가 맞아서 죽었다고도 했고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도 쳤다. 피를 흘리며 우짖는 비명이 사방을 채웠다. 사람들이 가을 낙엽처럼 뒹굴며 죽어갔다.
스무여 명이 가다 보니 한참 가다 보면 누군가가 안 보였다. 인파 속을 휘젓고 찾아내는 일도 참 힘들었다. 이틀 만에 찾아낸 숙모는 거의 죽음 직전이었다. 먹을 게 없어 내내 굶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길에는 이불에 싸인 노인들이 더러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에 먹을 걸 쥐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들 귀찮아서 누군가가 버리고 간 사람들이었다. 이 밤을 지나고 나면 폭격이 아니더라도 그 힘없는 노약자들은 동태처럼 빳빳하게 얼어 죽을 게 분명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아산을 거쳐 온양에 이르렀다. 마침 종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던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다소 조용한 가운데 어진이네는 숙모의 해산을 기다렸다. 이미 해산일이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다. ‘세상이 무서워 아이도 안 나오려나 보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되돌려 올라오는 길이었다. ‘하루만 더 기다릴걸.’ 해 질 무렵 숙모가 산기를 호소했다. 식구들은 모두 당황했다.
길옆으로 아주 넓은 호수에 물이 탱탱 얼어 있었다. 저쪽에 희미하게 마을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얼음 위를 걸었다. 얼음이 깨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시골집치고는 꽤 큰 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느 곳 하나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곧 해산해야 할 산모가 있는데 어쩌지요.”
어머니가 거의 우짖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대청마루에서 사십 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나 나왔다. 확인이라도 하듯 흘깃 숙모를 내려다보더니 안방 쪽으로 사라졌다.
“여러분! 모두 나오세요. 여기 애기 낳을 산모가 있습니다.”
아무도 일어날 기세가 없다.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엄마들도 애기 낳아 보셨잖아요. 산모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셔야죠. 얼른 나오세요.”
점잖은 남자는 바로 그 집의 주인이었다. 식구들은 피난처에서 아직 안 돌아오고 남자만 혼자 먼저 돌아왔다고 했다. 숙모 덕에 우리 여자들은 모두 안방 차지를 하게 되었다. 산모는 밤새 신음만 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다. 쫓겨난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야유를 보냈다.
“거짓으로 방 차지를 했네. 애기는 무슨.”
숙모는 새벽녘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동도 트기 전 간장을 얻으러 이웃집으로 달려나갔다. 무슨 국을 끓여줬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틀을 거기서 머물다가 사흘 만에 나왔다. 산모를 이불에 싸듯 꿍쳐 입혔다. 핏덩이는 어진이가 업었다. 사람을 업은 것도, 그렇다고 짐을 업은 것도 아니었다. 무거운 것도 아닌데 노상 흘러내릴 것 같았다. 거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만큼 살면서 겪은 별난 경험 가운데 하나였다.
아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접어들었다. 이장한테 사정을 말했더니 자기 집 안방을 여자들에게 내줬다. 그분의 어머니가 쓰는 방을 함께 썼다. 남자들에게는 외양간을 내주었다. 산모는 마을 어귀에 소임네 방을 주인과 함께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경위가 분명하고 착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소 뼈다귀를 열두 번씩이나 우려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번씩 우려낸 뼈다귀는 된장독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산모는 뼈다귓국으로 해산 후유증을 달랬다. 얼마나 고마운가. 피난처에서 뼈국이라니 그런 호강을….
음력으로 섣달 스무엿새 날. 새 해를 나흘 앞둔 날이었다. 시름시름 앓던 일곱 살짜리 막냇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어머니는 피난처에서도 아이들 설빔을 짓는다고 짐 속에서 꺼낸 헝겊들을 이리저리 꿰맞췄다. 동생은 그 무릎에서 시름시름 앓았다.
“엄마. 이건 내 옷이지. 예쁘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엄살도 않고 조용히 앓았다. 감기 정도나 앓고 일어나려니 하는 마음에 특별히 신경도 안 썼다.
“아니, 애가 이렇게 여러 날 앓는데 그냥 보고만 있수?”
주인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지청구를 놓았다. 병원도 약국도 있을 리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애가 감기를 그리 오래 달고 사네요. 곧 일어나겠지요.”
아이가 심하게 보채지를 않으니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어기 찾아가면 의원이 한 군데 있긴 한데 찾아가 보구려.”
할머니가 베푼 친절이 고마웠다. 아버지가 아이를 둘러업고 의원을 찾아 나섰다. 침을 맞히고 돌아왔다.
때마침 마을 이장이 아흔아홉 칸짜리 집에 방이 하나 났다며 알려줬다. 반갑고 고마워서 서둘러 이사를 했다. 방에 들어갔는데 왠지 섬찟하고 어깨가 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진이만 그랬을까. 지금까지 입밖에 그런 말을 물어보진 못했다.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은 방이었다. 동생을 그 방에 제일 먼저 눕혔다.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한 방에 같이한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동생의 신음이 모처럼의 밝은 분위기를 깼다.
“그 무서운 폭격에서도 다치지 않고 잘 견뎠는데 이 무슨 변고냐”며 어머니가 꺼이꺼이 울었다.…
피난 보따리에 하얀 깃 광목이 필채 들어 있을 거란 생각은 누구도 못했다.
그 옷감으로 만든 수의를 동생이 하늘나라 여행 갈 때 입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머나. 이게 뭐예요?”
다급한 어머니 말에 아버지가 놀라서 다가왔다.
“열꽃이구먼. 얘가 홍역을 하나 봐.”
동생의 얼굴은 검푸른 빛을 띤 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불로 급하게 바람막이를 했다. 어머니는 토끼 똥을 구한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진이한테는 밭에 나가 보리순이라도 뜯어오라고 했다. ‘보리순이 뭔지도 모르는데 언 땅에서 뭘 뜯으라는 말인가.’
“얘는 갑자기 왜 아파서 난리래. 손 시려 죽겠네.”
그렇게 어린 동생의 죽음을 앞두고도 투정했던 어진이는 지금까지 죄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저 세상 가서 만나면 그때라도 꼭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홍역에 걸린 아이에게 침을 맞히면 죽는다고 한다. 동생은 시커멓게 열꽃을 내 뿜으며 죽어갔다. 옆에 앉은 아버지의 당꼬바지 단추를 거칠게 열어젖히며 고통 속에서 헤맸다. 그러면서 엄마를 기다렸던 것일까. 어머니가 방에 들어서자 흘깃 쳐다보고는 그냥 눈을 감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그 무서운 폭격에서도 다치지 않고 잘 견뎠는데 이 무슨 변고냐”며 어머니가 꺼이꺼이 울었다. 아버지는 병원도 약도 없는 전쟁통이라 아이를 쌩으로 보냈다며 눈물을 흘렸다.
피난 보따리에 하얀 깃 광목이 필채 들어 있을 거란 생각은 누구도 못했다. 언니의 혼수품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 옷감으로 만든 수의를 동생이 하늘나라 여행 갈 때 입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야트막한 야산자락에 언 땅을 파고 동생을 묻었다. 파란 생솔 나무에 얹힌 흰 눈이 꽃처럼 화사했다. 마치 동생과 동무해줄 꽃다발처럼 보였다.
그 동생은 유난히 총명했다. 그 애를 낳고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렸다며 늘 복둥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일곱 해를 살았다. 피난길에 다리가 아파 보챌 만도 한데 한 번도 귀찮게 하질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힘들면 아버지와 오빠의 자전거 발걸이에 슬쩍 올라탔다. 커다란 학 한 마리가 매달려 가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어머니는 그곳을 떠나올 때 “저기 우리 애가 있다”며 절규했다.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의 슬픈 표정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 아이의 사진을 아주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살았다.
한강에서 길이 막혔다. 어쩔 수 없이 노량진에서 짐을 풀었다.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먹거리를 해결하고 땔감도 있어야 했다. 자고 나서 내다보면 피난 행렬 같은 대열이 길에 가득했다.
노량진에서 관악산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거기까지 땔감을 가지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른들이 언니와 어진을 그 대열에 합류시켰다. 힘센 남자들은 생나무를 마구 베어 지고 내려왔다. 자매는 흩어진 마른 가장귀 몇 개를 겨우 지고도 힘에 부쳤다. 그 하기 싫은 일은 어느 날 날아든 톱밥에 눈을 찔리면서 끝이 났다.
거리에는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방황을 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손에 시커먼 검댕을 묻히고 오가는 행인들의 길을 막았다. 손에 쥐여주는 게 없으면 따라다니며 검댕을 옷에 묻혔다. 제일 싫은 건 누런 코를 손바닥에 들고 다니는 애들이었다. 그 불쌍한 아이들을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여자들은 길에 나서기조차 두려운 또 다른 전쟁터였다.
뭐니뭐니 해도 그 시절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전쟁에 나갔다가 몸을 다쳐 돌아온 상이군인들이었다. 쇠갈고리 손이나 목발을 휘두르며 “당신들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지 아느냐?”며 호통을 치면 누구라도 고양이 앞에 쥐 꼴이 되었다.
내 식솔들이 한 끼 굶더라도 그들 손에 무엇을 쥐여줘야 무사했다. 언제 끝이 날는지 암담하기만 한 전쟁 뒤 사회의 침울한 모습이었다.
그 무렵 군대에서 막내 삼촌이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빌던 할머니의 공이었나 보다. 무사히 돌아온 그를 보면서 가족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한쪽 눈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도 결국은 상이군인이란 슬픈 훈장을 달고 온 것이다.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중 가장 악명 높은 보루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살아왔다니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기뻐했던 가족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팔다리가 잘린 게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억지 위로를 했다.
“의안이라 겉으로 보기에 크게 흉하지 않으니 불편해도 참고 살아라.”
그런 위로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세상과 절연한 사람처럼 너무도 조용하게 방 속에만 박혀 있었다. 혹시라도 비위를 거스를까 봐 온 식구가 조심조심 지켜보며 살아야 했다. 당연히 집 안 분위기가 밝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오소영_수필가
오소영은 1937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1998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1997년 회갑 나이에 <한맥문학> 수필 부문에 당선되어 늦깎이 수필가로 등단했다. 현재 여든 넘은 나이에도 교민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수필집 <13월의 바람꽃>, <언니가 오셨네>를 펴냈다. 무지개 시니어 중창단 총무 일도 맡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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