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이순신, 아베를 베다
8.15 광복절 74주년 특별기고 (1)
포로 중에서 아산작전에 참가했다는 일본군을 찾아낸다.
스물세 살, 아베 준이치이다.
아산작전의 전말에 대해서 듣고 난 이순신은 아베에게 살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아베는 불퉁스럽게 대꾸한다.…이순신이 칼을 뺐다.
“나으리, 어찌 손수….”
“비켜라, 피 튄다.”
이천년 대에 들어서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칼 한 자루씩을 내놓았다. 김훈의 『칼의 노래』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이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문학에서, 나아가 순수문학 작품에서 정치 판도나 민족의식을 찾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일 뿐 아니라, 떨쳐버려야 할 편견을 되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지양해야 할 일임에는 전혀 이론이 없다.
하지만, 모처럼 애잔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읽었다는 감회는 작품의 배경이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의 할배들이 비인간적인 처우 아래서 혹사당하던 홋카이도의 탄광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희석되어짐을 어쩔 수 없었다.
『칼의 노래』와 『칼에 지다』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제목이 편집자와 번역자에 의해서 바뀐다는 것이다. 『칼의 노래』의 원제가 ‘광화문 그 사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제목을 본 편집진에서 너무 신파적이라는 의견이 있었고,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칼의 노래』라고 정해졌다.
『칼에 지다』의 원제는 『임생의사전(壬生義士傳)』인데, 번역자 양윤옥에 의해서(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경위는 알 수 없으되) 한국어판에서는 『칼에 지다』라고 바뀌어 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소설과 영화 양쪽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두 작품 모두 오랜 구상 기간과 철저한 준비 기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훈이 ‘문학기행’을 쓰면서 오랫동안 이순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처럼 아사다 지로 역시 야쿠자 생활을 하면서도 구상과 조사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칼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서 그 뽑기를 처절할 만큼 억제했던 반면, 일본의 칼은 난세에 굶주리는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마구 휘둘러졌다.
『칼에 지다』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막부 말기이자 유신 직전, 냉혹한 계급 사회에 억눌려 살던 시골 무사가 헐벗고 굶주리는 처자식을 보다 못해 탈번을 하게 되고, 자신의 검술을 밑천으로 암살 전문 자객집단인 신센구미(新選組)에 들어가서 막부에 반대하는 존왕파 젊은이들을 베어 넘긴 피의 대가를 고향으로 보내는, 정세가 바뀌어 결국 자신의 친구이자 상사에게 할복을 명받고 죽어가는 그야말로 생계형 칼잡이의 이야기이다.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이 언제였을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의 놀라움과 충격으로 한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글에서 첫 문장의 중요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첫 문장에서 글의 정서와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구상을 마쳤으면서도 선뜻 노트북을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첫 문장을 집어내지 못했을 경우가 많다. 어렵게 첫 문장을 쓰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어느 지점까지는 실타래가 풀리듯이 술술 풀려나가는 경우도 없지 않다.
김훈은 어쩌자고, 아니 어떻게 저런 문장을 첫 문장으로 삼았을까.
칼의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 문체에 집중했고, 독특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깔끔한 등등 비평용어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업적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과연 놀라움과 충격이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결하게라든지, 군더더기를 뺀다든지, 남들과 다르게 달리 쓰고자 하는 의지와 흔히 말하는 수정과 퇴고만으로 그러한 문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문장을 가꾸어 다듬는다고 해서 살을 저미는 듯한 처절함과 궁색하지 않은 치열함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읽으면서 많이 생각했다. 단지 어법과 수사의 재주로 읽는 사람의 가슴에 새겨질 듯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거듭 읽어가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작가가 자신이 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 오래고 깊은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기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김훈은 집요하도록 난중일기를 파헤쳤고, 마르고 닳도록 남해안을 돌아다녔으며, 수없이 현충사를 드나들며 이순신의 칼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물고기의 비늘을 하나씩 떼어내는 심정으로 인간 이순신을 파고들었다.
또 하나는 시점(視點)이다.
『칼의 노래』는 여느 역사소설과는 달리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채용하고 있다. 김훈의 소설 대부분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흘러간 사건과 죽어 없어진 인물들을 다루는 역사소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의 나는 이순신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작품에서의 모든 서사의 주어는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실존했던 인물이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순신은 그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고 경험했다. 그 인물이 서사의 내용을 스스로 책임지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오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을 되살려서 그때의 심정을 토해내게 하듯 말이다.
이순신은 아플 때 아프다고, 가려울 때 가렵다고 말한다.
사타구니에서 젓국 냄새가 나는 관기와 두 번 했다고 말하고, 임금과 적군이 두려워서 식은땀을 흘렸다고 말하고, 불로 달군 단도로 살갗을 헤집어 총알을 발라낼 때 적탄을 맞았을 때보다 아프다고 말하고, 형장을 맞아 혼절했었다고 말한다.
더 할 수 없는 솔직함.
가감 없이 또 꾸밈없이 말할 때 비로소 간결하고 깨끗한 그리고 정확한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작품의 문장이 서늘하도록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솔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이번에도(일본의 수출규제와 우리의 반일 나아가 극일을 보면서)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 연필로 짚어가면서 꼼꼼하게 읽었다. 삼백오십여 쪽의 작품에서 대단히 강렬한 한 문장을 찾아냈다.
“비켜라, 피 튄다.”
이순신이 그토록 절제하던 칼을 빼든 것이다.
울돌목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아산으로 쳐들어간다. 이순신의 가족을 죽여 그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다.
가족들을 피신시킨 셋째 아들 면이 그들을 맞아 싸운다. 면은 검술에 능했다. 십여 명의 일본군을 해치운 후, 허벅지에 칼을 맞고서도 버티던 면은 어깨에서 몸통으로(세로로) 베어진다. 스무 살이고, 혼인하지 않았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신은 소금창고 가마니에 엎드려 숨죽여 운다. 할머니와 아비를 닮은 면이 베인 목을 늘어뜨린 채 꿈에 이순신을 찾아온다.
“아버지, 죽을 때 무서웠습니다. 칼을 찾아주십시오.”
그런 아들에게 이순신은 말한다.
“가거라. 죽었으면 가거라. 목숨을 물리지 못한다. 칼 또한 그러하다. 다시는 내 꿈에 얼씬거리지 말아라.”
면은 울면서 돌아간다. 이순신은 갈대숲으로 기어들어가는 아들을 부른다.
“면아, 면아.”
포로 중에서 아산작전에 참가했다는 일본군을 찾아낸다.
스물세 살, 아베 준이치이다. 아산작전의 전말에 대해서 듣고 난 이순신은 아베에게 살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아베는 불퉁스럽게 대꾸한다.
면은 죽고 아베는 살아서 내 앞에 꿇어앉아 있다. 살려주자, 살게 하자, 살아서 돌아가게 하자.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이순신의 몸 안에서 울어지지 않는다. 대신 징징징 칼이 울었다.
“끌어내다 베어라.”
“아니다. 다시 끌어오너라.”
이순신이 칼을 뺐다.
“나으리, 어찌 손수...”
“비켜라, 피 튄다.”
이순신은 말한다.
나는 아베를 베었다. 목숨을 가로지르며 건너가는 칼날에 산 것의 뜨겁고 뭉클한 진동이 전해졌다.
허은_기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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