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데자뷔

데카메론,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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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스 영의 건강 읽기(14) 


2주 전 한 가족 4명의 코로나 확진 판정으로 102일 동안의 편안한 일상이 깨진 뉴질랜드와 신천지사태 이후 하루 400명에 육박하는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대한민국 상황을 보며 과거를 돌아본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타당한 근거와 나의 상상력을 더해 지금의 팬데믹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처방전을 써보려 한다. (논리적 비약이 있다면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이해 바란다.)


어느 날, 만성 두통과 무력감으로 클리닉에 갔더니 기운이 많이 허약해졌고 그 원인이 ‘코로나 팬데믹’과 ‘암울한 뉴스들’ 때문이라고 한다면? 처방은, 뉴스 끊고 마음이 편해지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면?


600년도 훨씬 넘은 아주 오래된 책이지만 아직도 읽히고 있는 고전에서 진단의 실마리를 찾아본다. 내가 발견한 네 가지는 지금의 펜데믹 위기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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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14세기 팬데믹

지오바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Decameron)’은 1348년 페스트(흑사병)가 만연한 피렌체의 대성당에서 시작된다.


둘째. 자가격리

흑사병으로 가족이 모두 죽고 우울함을 달래려고 미사에 참석한 7명의 부인은 서로에게 슬픔을 토로한다. 그중 지혜로운 여인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도시를 떠날 것을 제안하고, 때마침 나타난 3명의 청년이 가세하여 교외로 떠난다. 


셋째. 뉴노멀

아름다운 별장에 모인 10명의 청춘남녀는 오직 즐거움만을 위해 살기로 약속한다. 느긋하게 일어나 식사와 산책을 하고, 오찬과 낮잠을 즐긴 뒤, 각자 그날의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매일 이어지는 이야기 축제는 성 금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열흘 동안 이어진다. 


이렇게 열 명이 열흘 동안 쏟아낸 이야기 백 편을 모은 것이 바로 데카메론이다. ‘데카(deca)’는 ‘열’을 나타내는 말로 ‘데카메론’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열흘간의 이야기’가 된다.


넷째. 갈등과 풍자

일반적인 문학사에서 단테의 ‘신곡(神曲)’은 중세 문학의 완성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근대문학의 시초로 거론된다. 역경을 이겨낸 연인들,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하층민들, 적나라하게 풍자되는 성직자들, 신분을 뛰어넘어 우정을 맺는 사람들, 개성 강하고 목소리 큰 여인들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인곡(人曲)’이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구윤숙 작가의 ‘데카메론’ 중에서)

다만, 갈등의 구조는 비슷하지만, 그 갈등을 풀어나가는 지금의 방식은 풍자를 넘어 극단을 치닫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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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사례

“방역 모범국이던 뉴질랜드와 한국이 무너졌다.” 지난주, 미국 대통령이 선거유세 연설에서 비웃듯이 한 말이다. (자신이 코로나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뉴질랜드의 경우, 102일 만에 방역 망에 구멍이 생긴 것은 사실이고 우리도 다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이런 예배에 참여하면 성령의 불이 떨어지기 때문에 걸렸던 병도 낫는다”


지난해 10월 전광훈이 청와대 앞에서 개최한 집회에서 한 발언과 코로나19 감염 우려가 컸던 지난 2월 광화문 집회 때 한 말이다. 그는 종교를 정치화하고 코로나 대응을 종교탄압이라 운운한다. 


중세 역사에서 보았던 혹세무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불쑥불쑥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면서 몸속 스트레스 호르몬(코리티졸) 수치가 치솟고 (꼭 필요할 때 써야 할 호르몬을 낭비하게 되어) 정작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나 일을 수행해야 할 때 쉽게 포기하게 되고 낙담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두통이 유발되거나 무기력해진다.


근원과 공생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깨끗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 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과거부터 개신교는 구제 사역에 힘써왔다. 


문체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 사회복지법인 숫자는 529개로 그중 개신교가 운영하는 기관이 절반(259개)에 달한다. 기독교가 우리 사회 내에 긍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부분이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전광훈 목사, 그는 과연 이 땅의 빛과 소금인가? 에서) 그런데 일부 성직자는 정치세력화의 길을 택했고 지금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개신교는 몸과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지만 ‘기도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으로 자라났다. 


이념 전쟁으로 모조리 패허가 된 궁핍한 삶으로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된 사람들에게, 언제부터인가 일부 개인이나 집단은 화약 냄새만 맡아도 몸서리쳐지는 사람들의 이념적 트라우마를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고 고착화시켰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의 우리들이 같은 사안을 놓고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근원이 아닐까.


정당한 코로나 방역지침조차 자신들을 탄압하는 행위라며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부 집단은, 달은 보지 않고 그것을 지적하는 손가락만 탓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보통사람들이 볼 때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조차 부정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아닐까. 


본질을 왜곡하는 데 익숙한 개인이나 집단은 어디에든 어느 시대에든 있었다. 마치, 우리 장 속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나쁜 미생물과 좋은 미생물이 공존하는 것처럼.


건강은 나쁜 미생물을 모조리 박멸할 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미생물이 우위를 지키기 위해 좋은 음식, 바른 행동, 바른 마음을 유지할 때 지켜진다. 건강한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밸런스 영의 건강 습관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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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지금은 월드컵로, 하늘공원, 망리단 길, 멋진 한강공원을 연상하게 되는, 서울 변두리였던 마포구 망원동이 내 어릴 적 동네다.

1970년대만 해도,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는 동네로 유명했다. 1972년 큰 수해로 온통 물에 잠긴 동네를 보게 된 당시 신학대 학생 이상양은 주선애 교수님께 “제가 이 동네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라며 뚝방동네에 남는다.


이상양 전도사는 애린(사랑 애, 이웃 린)이라는 이름의 천막 교회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의료봉사단을 섭외해서 건강을 챙겨주고 동네 자치모임을 만들어서 술 대신 저축통장을 만들어 주고 주택조합을 만들어서 내 집 짓기 운동을 펼쳤다. 


그는 폐결핵으로 무너져가는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젊은 날을 불사르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지금도 그분의 선한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과 뒤를 이은 김기복 목사님의 ‘뚝방마을 이야기’의 선한 영향력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종교와 인종을 불문한 선한 영향력은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치유력을 지닌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 나누고 싶은 건강 노하우가 있으시면 연락 바랍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칼럼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영철 한의사 

027 630 4320  ㅣ  tcmykim1218@gmail.com

Balance Young Clinic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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