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내 친구, 은경이

[문학의 숲] 내 친구, 은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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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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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필명)–

스콜라문학회 회원


웃음소리

“OOO씨?” 

은경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풍성한 위아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사방 이십 미터까지 퍼진다. 경상도 여자는 이렇게 다 시끄러운가. 같이 걷는 내가 조금은 민망하다. 


반가움의 표시치고는 다소 지나치다. 옛 친구와의 해후가 명동 오후의 햇살에 빛난다. 합쳐 백 세가 훌렁 넘은 우리는 합쳐 환갑이 다 되는 우정을 느낀다. 


걸음걸이

뚜벅뚜벅, 성큼성큼. 보폭이 내 폭보다 길다. 폭의 각도도 나보다 넓다. 전형적인 팔자걸음. 은경이는 엉덩이를 조금 뒤로 빼고, 나는 엉덩이를 바투 조이고 걷는다. 남자인 내가 보조를 맞춰야 한다. 


걸을 때 신발 뒤꿈치 소리가 들린다. 뒷굽의 무게가 대지를 사정없이 누르는 소리다. 뒤도 옆도 보지 않고 걷는다. 입으로는 나와 얘기하고, 발로는 세상과 대화한다.


생김새

가수 정태춘의 부인, 박은옥을 닮았다. 얼굴이 좀 크다. 어깨가 넓고, 기골이 장대하다. 길을 걸을 때 유독 팔을 거세게 흔든다. 키는 165cm 정도. 말투, 걸음투, 몸투 모두 싱싱하다. 


어디 하나 또렷이 예쁜 데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디 하나 뚜렷이 못생긴 데도 없다. 미인이 아니니 박명할 염려는 없다. 늙은, 그러면서도 착하게 보이는 운동권 학생 같다. 


내가 은경이를 처음 만난 것은 스물일곱 살 때다. 같은 신문사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같은 직종에서 일했다. 둘 다 글 쓰는 일이었다. 은경이는 유독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르포 기사를 잘 썼다. 


동료 기자들 사이에 ‘글 잘 쓰는 기자’로 알려졌다. 나는 남이 조금만 인정해 주는 그저 ‘기획만 잘하는 기자’였다. ‘무언가를’ 잘 하는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다. 나랑 동갑이기도 했지만 서로 뜻이 크게 엇갈리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만나 차를 마시며 한국 교계의 병폐를 논했다. 은경이는 보수 교단의 반민주성을, 나는 교계 지도자의 강단 뒤 위선을 고발했다. 한두 시간 얘기를 잇다보면 주제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렀다. 


소외 계층과 책에 대한 얘기였다. 은경이는 유독 장애인에 애정이 많았고, 나는 헌책에 관심이 많았다. 서른해 전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헌책은 그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은경이는 기자 생활 서너 해 만에 글 쓰는 일을 포기했다. 출판사를 차리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돼 대타로 출판기획사 비슷한 것을 차렸다. 명동성당 앞에 있는 대한YWCA 건물 6층에 터를 잡았다. 남의 회사 원고 쓰고, 편집하고, 교정 보는 일을 혼자 다했다. 완전 일인회사였다.


나는 서른 두 살에 오클랜드로 이민 왔다. 그 나이 때 누구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나는 한국의 불가해한 현실이 싫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피신했다. 


그때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해 준 친구가 은경이었다. “힘들어도 같이 살자”고 부탁했다. 비참한 장애인의 현실을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은경이를 뒤로하고 나는 ‘나 혼자만 잘 살겠다’며 호기있게 비행기에 올라탔다.


한국을 떠난 지 벌써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이삼 년 주기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은경이를 만났다.


은경이는 내게 밥을 사 주고, 음악 공연을 구경시켜 주고, 좋은 곳을 소개해 주었다. 명동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부침개를 맛보았고, 예술의전당 앞 소극장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의 연주를 만끽했다. 


그리고 체류비도 여유 있게 건넸다. ‘친구라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게 그의 마음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몸과 맘 만은 줄 수 없는, 은경이의 남자친구였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와 또 한 명의 유부녀(셋 다 친구 사이)와 함께 일박이일 여행을 떠났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준비한 행사였다. 가을 단풍 놀이었다. 


은경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안동에는 볼 것이 많았다. 안동댐, 도산서원, 이육사기념관…. 세상 잡음 안 들리는 그곳에서 우리 우정은 더 깊어갔다.


안동 인근 청계산에서 펜션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은경이의 고향 선배를 만났다. 그가 은경이를 보자마자 처음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여자 웃음소리가 그게 뭐냐? 팔자걸음도 좀 고치랬더니…. 그래서 시집 갈 수 있겠니?”


은경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오히려 더 크게 웃고, 아무 죄 없는 길가의 돌멩이만 그 큰 발로 거칠게 찼다. 나는 애써 얼굴을 돌려 옹골지게 흘러가는 계곡물을 응시했다. 


늘 씩씩했지만 그날따라 마음 아프게 더 씩씩했던 그의 몸짓을 보며 나는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가슴이 저렸다.


내 친구, 은경이의 꿈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사는 뉴질랜드에 놀러 오는 것이다. 사진을 기가 막히게 잘 찍는 그는 “남섬은 셔터만 누르면 달력 사진이 된다”는 조금은 과장된 내 말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오겠다며 벼르고 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나는 잘 모른다. 그저 은경이 옆에 나 말고 다른 남정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요즘 내 친구, 은경이가 어떻게 사는지 알려주고 싶다. 비록 돈은 크게 안 되지만 출판 대행 회사 같은 것을 꾸역꾸역 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밝게 해 주는, 장애인 봉사 활동은 늘 그의 행복 리스트 일위다.


이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나는 내 사반세기 친구, 은경이의 너털웃음과 팔자걸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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