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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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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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존재해온 빌어먹을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고 몰려든 생때같은 젊은이 156명이 눌려 죽고 196명이 다쳤단다. 

폭 3.2미터 길이 40여미터 되는 좁은 내리막 골목길에 한꺼번에 수천 명이 몰렸다가 사고를 당했단다. 


나라 돌아가는 꼴도 그렇고, 정치하는 인간들 눈뜨면 싸우고 눈감으면 싸울 궁리하는 세상이 하도 답답하고 꿈도 아득해, 스트레스 날려버리려고, 사는 것에 활력 받으려고 나갔다가 같은 마음으로 나선 청춘들에게 가슴이 짓눌려서 그렇게 됐단다.


정치한다는 인간들은 난리가 났다. 이게 웬 사고냐부터 이게 웬 참사냐까지 얽혀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정부 여당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정권 유지에 득이 될 것이냐에 골몰하느라고 밤잠을 설치면서 잔대가리를 굴렸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어찌 미리 알겠냐는 운명론자를 자처하는 놈이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걸어가다가 숨졌다는 철학자연하는 놈이 나오고, 외신기자회견 자리에서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염장 지르듯 빙글빙글 웃는 놈도 있었다.


핼러윈(Halloween)은 고대 켈트족 기념일에 가톨릭 만성절 전야제가 결합된 영어권 기념일인데 왜 한국 젊은이들이 그날을 즐기려고 아우성을 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같잖은 지식팔이를 해대는 지식인연하는 인간까지 나왔다.


정부 여당은 해당부서 장관을 감싸며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모면하려고 국민들의 책임추궁에 유체이탈화법으로 얼버무렸고, 야당은 그게 말이나 되냐며 대통령은 사과하고 총리 이하 내각은 전원 사퇴하라고 소리쳤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고 말장난을 했다. 공직자들에겐 근조(謹弔)라는 리본 대신 글씨 없는 검정 리본을 패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지들 정부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거다. 죽고 사는 것이 니들 팔자지 정부의 잘 잘못은 아니라는 뉘앙스다. 대단한 정무적 판단이고 구토 나는 정책적 발상이다.


태극기부대라는 극우를 자처하는 꼰대는 “그러게 거길 왜 가”라면서 짓눌려 숨진 청춘들을 빈정댔다. 이 꼰대는 지가 살 자리 죽을 자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천공 스님 추종자답다.


쌓여지고 조여오는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 방법이나 길이 없는 젊은 청춘들에게 세상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것에 대해 속죄하고 사죄하는 사려 깊은 어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모든 걸 정치적인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고 지껄였다. 참 빌어먹을 것들로 온 나라가 요란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라는 꿈나무들을 수장시킨 일이 아직도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팔팔하게 뛰어다니는 젊음들을 밟혀 죽게 하고서도 ‘그러게 수학여행을 왜 가’ ‘그러게 남의 나라 축제를 왜 즐겨’라며 개념 없는 인간들의 떼창만 난무했다. 그래서 ‘이게 나라냐!’라는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거다.


이태원은 내가 소년기를 보낸 해방촌 바로 옆 동네다. 해방촌에서 이태원으로 향하는 100여미터 되는 완만한 오르막길 우측으로 미군부대가 있었다. 


미군부대에 옆을 지날 때면 고소한 버터 바른 빵 굽는 냄새가 풍겨 입에 침을 고이게 했다. 어린 나에게 미군부대는 부자들 동네였다.


오르막길 왼편에는 이태원국민학교가 있었다. 고향 떠나올 때 전학하기로 했던 학교였다. 그런데 해병 장교인 매형이 이태원국민학교보다 더 좋다는 이태원 반대편에 있는 후암동 삼광국민학교로 전학 시켜줬다. 그래선지 이태원국민학교를 지날 때면 들여다보고 싶었다.


오르막에 올라서면 눈 아래가 이태원이었다. 이태원 입구에는 한국국토방위에 공로를 남긴 ‘콜터 장군’ 동상이 서 있었다. 동상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이태원은 미군이 권총 차고 지켜주는 미국 사람들 동네 같았다.


이태원은 신문 배달할 때 내 구역이 아니었지만 우연찮게 서너 집을 배달했다. 그중에 이른바 ‘양색시’가 있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 새벽에 양색시가 사는 문 앞에 신문을 떨어뜨리자 학생! 하고 나를 부르더니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컵을 내밀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면 따끈하게 데운 우유를 얻어 마시곤 했다. 잊혀지지 않은 사람 같은 사람의 기억이다.


그런 추억들 때문에 죽기 전에 한번은 찾아가 보고 싶은 이태원이었는데 이젠 단념해야 할 것 같다. 이태원엘 가면 사람 같은 사람 양색시의 모습은 흩어지고, 밟히며 숨져간 푸른 청춘들의 분노만 쌓여있는 그 빌어먹을 것들에 내가 울화병 걸릴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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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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