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얼굴은 세월을 말하는가

당신의 얼굴은 세월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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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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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은 영화감독이다. 1997년에 영화 <초록 물고기>로 데뷔했다.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재직시절 소설 <전리>가 신춘문예에 당선돼 소설가로 활동했다. 참여정부 시절엔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삶의 철학과 소신이 투철한 인물이다. 그가 영화에서 그리는 인물은 만들어진 인물이 아닌 삶에서 부딪히는 실존 인물이다. 허구와 억지 희망을 거부한다. 


그가 만든 영화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밀양> <시> 등이 있다. <시>는 시의 아름다움과 윤리에 대한 이야기로서 60대 중반 여인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는 영화다.


<시>에서 프랑스에 살고 있는 영화배우 ‘윤정희’가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관계자들이 고국에 나이든 유명한 배우들도 많은데 굳이 윤정희를 선택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이창동이 그랬다.


“많은 여성들이 얼굴을 뜯어고쳐요. 성형수술을 쉽게 해요. 자연미가 사라지고 진솔한 삶의 모습이 얼굴에 남아있질 않죠. 윤정희는 눈썹에도 칼 대지 않았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에 부대낀 삶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있어요.”라며 내가 아닌 내가 판박이처럼 즐비한 세태를 꼬집었다.


이창동은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인간에 대한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현실 속에 내포된 가치들을 스크린으로 끌어들이는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가식적으로 살아온 듯한 포장된 얼굴을 원치 않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가 말했다. “’얼굴’의 옛말은 얼골,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 다시 말하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얼굴은 자신의 영혼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꽤 오래된 일화다. 6, 7년쯤 된 것 같다. 우연히 그를 식당에서 봤을 때 한순간 못 알아봤다. 그가 나를 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짓자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너 아무개 아니냐?” “누가 아니래요?” 어설픈 악수를 나눴지만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내가 라디오방송국 운영할 때 알게 됐다. 자주 만나 골프도 치고 식사도 나누곤 했다. 그러다 라디오방송을 중단하면서 세상살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 후 수년이 지난 뒤 우연히 식당에서 보게 된 거다.


그의 얼굴은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변해있었다. 속일 수 없는 세월의 훈장이라는 얼굴의 주름살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흡사 다리미로 바지의 주름살을 다려 쫙 펴놓은 듯 미끈했다. 


삶의 연륜이 새겨진 얼굴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무슨 얼굴이 이래.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일었다. 설렁설렁 안부를 묻고 돌아섰다.


곁에 있던 녀석이 내 귀에다 대고 소곤댔다. “얼굴 땡겼네요.” “얼굴 주름살 폈다는 거야? 여자도 아닌 늙은 사내 녀석이?” “여자 남자가 어딨어요? 젊어 보인다면 뭔 짓을 못 해요, 돈만 있으면 땡기는 거지.” 녀석이 클클클 웃었다.


며칠 후 그에게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알겠다고 했지만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 왠지 그가 자신의 삶의 철학과 정체성을 상실한 그냥 꿈틀거리는 무뇌충 같았다. 외계인 같았다. 


영혼이 떠나버린 유령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와는 꾸미지 않고 보태지 않고 즐겁고 아프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진솔한 인간으로서의 얘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전에 아들 내외와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갔었다. 사진 잘 찍는 며느리가 가는 곳마다 추억으로 남기라는 듯 사진을 찍어줬다. 폭포를, 호수를, 찻집을, 기념품점을 배경으로 아내와 나는 나란히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포즈를 취했다.


두 팔 벌려 흔쾌히 세월을 껴안은 아내의 얼굴이 견뎌온 세월과 인생을 얘기하듯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곱고 맑던 얼굴에 삶의 애환이 가만히 내려와 있었다. 


누구 말처럼 눈썹 하나 건드리지 않은 아내의 주름진 얼굴에 울컥 가슴이 시리고 저려왔다.


나는 한때 의도적으로 주름살 깊이 패이고 구겨지는 내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든 어느 날 “삶은 기록이다. 


그 기록은 얼굴에 남는다”는 깨우침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 후부터는 담담한 마음으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나는 세월에 못 이겨 폐가처럼 구겨지고, 무너지고, 흩어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신영복 교수가 말한 ‘소멸의 미학’을 되뇐다.


“시골의 폐가가 소멸해가는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돌담과 대문이 허물어져 있고, 마당에 잡초 가득하고, 기와가 흘러내리고, 마루와 문틀이 해체되는 그 소멸의 미학이 한 가닥 위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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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규(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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