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웨버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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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의 책따라 생각따라(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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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사법부는 "대학교수의 지위를 이용해 수년간 반복적인 입시 비리 범행을 저질렀다"고 질책했다. 또한 "범행 동기와 죄질이 불량한 범행"이라는 지적과 함께 "입시제도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입시 부정’은 엘리트 부부를 감옥으로 보내고, 한 정권의 몰락에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 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 <스카이 캐슬>로 익숙한 ‘대학 입학 부정’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2019년 3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 상담가가 교묘하게 설계된 입시 부정 사건을 저질렀다. 그는 8년간 2,500만 달러를 챙겼다. 시험감독관 매수, 운동부 감독에게 허위 선수 자격증 위조 등 범죄를 저질렀다.

마이클 샌델은 27세에 최연소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80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0년 한국에 ‘정의(正義: justice)’ 열풍을 일으킨 그가 이번에는 무자비한 ‘능력주의의 덫’을 해부한다. 

10년 만에 던지는 충격적인 화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 능력 있는 자만을 위한 낙원, 현대사회의 그림자를 들추어냈다.

1970년까지는 대학 학위가 없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편안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일이 가능했다. 이제는 훨씬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1979년에는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40% 많은 수입을 올리는 데 반해, 2000년대에는 80%까지 높아졌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부유한 젊은이들까지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이유는 능력주의의 사명 때문이다.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고 강요받고 있다.

과연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실 철학과 신화의 역사와 뿌리를 같이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공공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호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왕(王)-철인(哲人) 사회를 상상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을 생겨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즉 능력주의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를 강조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1958년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의 등장>이라는 책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능력주의의 신화의 세 가지 명제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hubris)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좌절로 몰아가고 있다. 기회의 문으로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오만의 상징이 되었다.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 신념은 연대(連帶)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기술관료’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 버렸다.

현대를 사는 우리 특유의 문제 중 하나는, 일부 능력주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중요성에 취한 나머지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잊은 것이다.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인 것을 간과한 것이다. 재능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행운이고, 후하게 보상받는 사회에 사는 것도 우연이다. 성공은 재능과 노력의 혼합물이다.

교황 바오로 2세 1981년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공동선(共同善)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김영안

한국서예협회장, 전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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