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정의 일상의 습작] 부산역에서의 해후

[그레이스 정의 일상의 습작] 부산역에서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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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메우의 여인, 그레이스 정의 ‘일상의 습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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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년 전에 다시 방문한 친구와(로토루아 호수)


나는 요즘 만고의 진리인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 인간의 무지함과 무모함이 불을 보듯 뻔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예외일 거라는 야릇한 기대 속에 대응과 대책을 허술히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코로나 19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다행히 남반구에 있는 뉴질랜드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어 전 세계를 강타하는 재앙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우리에게 창조주는 무지한 인간 세상의 결과물과 그 안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당신의 무력한 자녀들을 안타까이 바라보시며 오랫동안 하늘의 문을 닫고 비를 막고 계신다.


어쩌면 우리의 욕심과 잘못을 돌아보며 그들과 함께 애통하며 회개하라는 마음을 전하시는 듯하다. 

이런 뒤숭숭한 일상 속에 초고를 단짝으로 붙어 다니던 내 어린 시절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아이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조기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고 몇 달 전에 연락을 받은 뒤,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중 며칠 전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가 잘 나와 내일모레 오클랜드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반 친구로 만났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문과와 이과로 반은 달랐지만 각자의 반에서 반장을 맡았다. 줄곧 학생회 일을 하며 우리는 명주와 은주란 이름으로 꽤 선생님들께 유명한 단짝이었다.

내가 결혼을 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기 전까지는 각자의 추억과 일상 속에, 가장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 우린 늘 함께했었다. 내가 이쪽으로 이민을 오고 친구는 오랫동안 사귀던 남친과 결혼을 했다. 친구는 내가 사는 곳으로 신혼여행을 왔다. 벌써 이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은주는 뉴질랜드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살던 오레와에 신혼 둥지를 틀겠다며 한국으로 가 신혼살림을 바리바리 장만해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꽃보다 예쁜 큰딸을 낳았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던 모래시계 여주인공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경험에 지쳐 이민자로서의 삶이 고단한 결혼 초년생이었다. 이민자 초보 주부로 도움을 받을 이웃도 별로 없었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누기에는 남편도 참으로 멀리 있었다.

여고 시절 순수함으로 서로에게 기대며 살고 싶었던 친구와 내게 당시 삶은 녹녹지 않게 우리를 끌고 갔고 친구와 나는 우리를 넘어서 각자의 가정과 남편과 아이들, 각자의 삶이란 것이 어느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리 온실 속의 화초처럼 예쁘게 우정을 키워 가다 뉴질랜드라는 삶의 광야 한복판에서 현실과 맞닥뜨렸고 무경험자답게 이끌리며 서로에게 난생처음으로 섭섭함과 우리가 아닌, 너와 나란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는 어여쁜 딸과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 이십 대 이곳에서 맛본 가장 슬픈 이별 중 하나였다.

그 뒤 2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는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친구를 한국에서 두 번 만났다. 어릴 적 친구가 살았던 동네를 샅샅이 돌며 찾았지만 내 집처럼 다니던 친구 집이 보이질 않았다. 친구 부모님을 만나면 연락처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몇 시간을 헤매고 허탕을 친 마음의 헛헛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극적으로 내가 출국하기 하루 전 친구가 부산으로 이사를 가 거기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출국을 해야 함에도 주저 없이 부산행 KTX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도착 시각은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

나는 친구와 몇 시간의 해후를 즐긴 뒤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와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한다. 나는 표를 예약하고 친구에게 연락했다. 부산역에서 만나자고.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그 시간 동안 난 삼십 년의 세월을 오가며 그 친구와 나눈 추억을 곱씹었다.


일이 바빠 내 머리를 한 번도 곱게 빗겨 주지 못했던 우리 엄마와는 달리, 늘 양 갈래의 머리를 곱게 땋고 학교에 오던 내 친구, 고등학생 때는 서로 좋아해 시집을 가지 말고 둘이 그냥 같이 살자며 깔깔대고 웃었던 우리. 걸어서 십 분 거리에 떨어져 살며 수다가 끝이 나지 않아 여름밤이 깊도록 슬리퍼 소리를 내며 서로를 데려다주며 귀뚜라미 소리에 질세라 깔깔거리며 웃던 우리. 이런저런 추억에 나를 맡기다 보니 나는 어느새 어둠이 깊게 내린 부산역에 도착해 있었다. 


부산에 가 본 적은 많지 않았지만, 말만 들어도 정겨운 자갈치 시장과 용필 오빠의 공전의 히트곡 때문에 부산행 기차는 늘 내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오늘은 그 정점이 되리라. 

만나면 어디서 뭘 할지 계획도 없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컴컴하여 으스스한 부산역 광장에서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예전의 그 미소 그대로 친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술에 취해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의 소리조차 귀에 안 들릴 정도로 우리는 기쁨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땅히 들어갈 커피숍도 없었다. 새벽 4시면 다시 기차를 타야 하니 어디 분위기 좋은 곳으로 옮길 시간도 아까웠던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어릴 적 동네 목욕탕을 일주일마다 같이 가던 소녀의 마음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역전 근처의 찜질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식혜도 먹고 계란도 먹으러 십수 년 전 우리로 돌아가고 싶어 마음이 조급했다.


서울의 찜질방을 생각하고 들어갔던 우리는 손님의 대부분이 역전 근처 취객들이라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몇 시간 뒤면 헤어져야 할 우리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게 얘기하려 해도 내 말에 공감하는 친구의 목소리, 친구 말에 공감하는 내 목소리는 고요한 사우나 안을 울렸고거 좀 조용히 해하는 부산 싸나이들의 고함에 우린 비상구 계단으로 피해 수다를 이어 갔다.


딸 아이 밑으로 아들 둘을 더 낳았다는 친구의 말에 나도 아빠 똑 닮은 늦둥이 딸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이며, 서로의 부모님 안부를 나누고 뉴질랜드에서 헤어지고 맘이 늘 아프고 미안했다는 말을 서로 나누며 우린 그 오랜만의 짧은 해후를 접어야 했다.


여덟 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내 소중한 친구가 4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로 왔다. 난생처음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아들 둘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우리는 아마도 서로의 생일을 예전처럼 기뻐하며 남편과 아이들과 나누지 못하는 속내를 털어놓으며 둘만 인정하는 10대처럼 우리의 떠나는 40대를 채워 가리라.

친구야 난 네가 와서 참 기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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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로 신혼여행온 친구 부부와(무리와이 비치)





그레이스 정
뉴질랜드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쿠메우 하코트 부동산 에이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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