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자랐다면, 다른 어른이 됐을까?

사랑받고 자랐다면, 다른 어른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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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자랐다면, 다른 어른이 됐을까?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날은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맞은 날이었다.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빨리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신호등의 빨간불도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엄마가 일하고 있는 미용실 문을 열자마자 쉴 틈 없이 말했다. 이번 받아쓰기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다른 친구들은 얼마나 많이 틀렸는지, 시험 시간은 몇 분이었는지…. 엄마는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손님의 머리를 만졌다. 나는 바쁘게 일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엄마는 앉아 있는 손님의 꼬불거리는 머리를 보고.


“그래, 잘했어.” 한마디만 남기고 엄마는 다시 손님의 머리에 달려 있던 알록달록한 파마 롤을 풀었다. 차가운 물이 가슴에 끼얹어졌다. 온탕에 있다가 강제로 냉탕에 들어온 느낌. 내가 상상한 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참 잘했다며 따뜻하게 안아주는 엄마였는데…. 반나절의 설렘이 한순간에 증발됐다.


이런 일은 그후로도 종종 발생했다. 퍼즐을 빨리 맞추는 나를 보며 고모가 “참 잘한다”라고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의 얼굴은 가게에서 파마 롤을 말고 있을 때의 얼굴과 똑같았다. 몇 번의 반복되는 상황을 겪고 나서야 어렴풋이 짐작했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점점 엄마와 나눌 말을 잃어갔다. 중학교에 다니는 내내 나는 학교에서 겪은 일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고, 엄마도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엄마는 쇼윈도 부부처럼 지냈고, 나는 겉보기엔 멀쩡한 아이로 무럭무럭 자랐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종종 사무치는 부러움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친구가 매일 자기 전에 부모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 다른 친구는 아직도 엄마가 자신을 ‘공주’라고 부른다 했을 때. 부러운 마음은 곧장 해답 없는 서러움으로 바뀌곤 했다. 왜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 프리다의 이야기다. 아픈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외삼촌 가족과 함께 살게 된 프리다는 사촌 동생 아나를 질투한다. 아나의 일상에는 이미 부모의 사랑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더 많은 애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 아나를 프리다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특히 엔딩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온 가족과 함께 놀던 프리다는 처음 느껴본 행복한 감정에 놀라서 울음을 터트린다. 애정 결핍을 느끼며 하루하루 불안해하던 프리다는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가족과 완벽한 일치감을 겪었을 때, 웃음을 넘어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는 결국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불행히도 나이만 먹으며 간신히 자랐다. 그래서 사랑을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혼자 사는 나에게 직접 만든 반찬을 싸다 주는 남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프다는 말에 죽을 끓여주겠다고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오는 그의 마음에 의문을 품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해주는 거냐고 물어보면, 좋아서 하는 거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사랑받는 낯선 감정을 믿지 못했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마음을 숨겼다. 결국 그와 헤어지고 부질없는 상상을 한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난 어떤 어른이 됐을까. 그의 마음을 고맙게 잘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도 널 좋아한다는 솔직한 애정을 표현하는 보통의 연애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이지만, 아직도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프리다로 살고 있나보다. 이제는 슬퍼서 울 일만 남은, 늙어버린 아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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